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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여로" 라 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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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쁨 작성일15-03-30 00:13 조회1,0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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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애    | 2012·09·27 01:42 | HIT : 155 | VOTE : 8
 
 

 흉흉한 얘기들이 들릴때마다  제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리스트 카터 지음)에 소개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땅은 빼앗기고 떠나야 했지만 결코 자신들의 영혼을 빼앗아가도록 하지 않았던 체로키 족의
 눈물의 여로에 대해....자료를 찾아 그대로 옮깁니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와 종잇조각 하나를 내 보이며 서명하라고 했다.
새로운 백인 개척민들에게 체로키족의 토지가 아닌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서류라고 하면서,  체로키들이 거기에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정부군 병사들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찾아왔다. 병사들 말로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종이에는 체로키들이 자기들의 골짜기와 집과 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체로키들은 저 멀리 해 지는 곳으로 가야했다. 그곳에 가면 체로키들이 살도록 정부에서
 선처해준 땅, 하지만 백인들은 눈곱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이 있었다.

병사들은 그 드 넓은 골짜기를 총 으로 빙 둘러쌌다. 밤이 되면 빙 돌아 피워놓은 모닥불이
 총을 대신했다. 병사들은 체로키들을 그 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산과 골짜기에 살고 있던
 체로키들까기 끌려와 우리 속에 든 소, 돼지처럼 계속 그 원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이런 상태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체로키들을 거의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들에게 해가 지는 그곳까지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체로키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덕분에 체로키들은 무언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볼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켰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마차를 타지않고 걸어갔다.

정부군 병사들은 체로키들의 앞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걸어갔다.
체로키 남자들은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들 뒤를 따라 걷던 여자들과 아이들도 병사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기나긴 행렬의 맨 뒤쪽에는 아무 쓸모없는 텅 빈 마차가 덜그럭거리며 따라왔다. 체로키는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땅도 집도 모두 빼앗겼지만, 체로키들은 마차가 자신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도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갈 때면 백인들은 양옆으로 늘어서서 체로키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처음에 백인들은 덜그럭거리며 빈 마차들을 뒤에 달고 가는 체로키들을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체로키들은 웃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백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 백 몇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3 분의 1 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 병사들은 3 일에 한 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들에게서 손을 떼고싶은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이 죽은 아내를 ,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줄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젇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 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수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하게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가는 동안 감기지 않은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밤 내내 그옆에 누워있다가 아침이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그리고 쳐다보지도...말하지도..울지도...고향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불렀다(1838~1839 년에 걸쳐 1만3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차례로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1300 킬로미터의 행진 중에 추위와 음식부족,병,사고 등으로
 무려 4 쳔여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죽었다고 한다)



어떤 목사님은 술을 마시며 목회한다고 화통하다고....내 친구는 삼촌인 목사님이 조카 개업식에 와서 돼지머리에 절을한다고...오히려 존경하게 되었다고....황당해 하는 내게 성당다니는 친구는 말합니다  "남의 집에 놀러가면 그 집 어른한테 인사하는거 아니냐고..."
그건 아니지 않냐고 ..하나님 자녀면 그 방법으로...영적간음아니냐고  열을 내면
 그래서 너거가 욕 먹는 거라고 ..꽉 막혀 생각의 유연성이 없다고...


체로키들은 그렇게 그들방식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지켜갔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영혼을 지켜가야 할까요?
고지식하다고...저거 신앙만 옳다한다고...비웃는 이 세상 속에서..


한 교수님이 자기 돈 떼인 얘기를 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합니다
" 그 사람 교회 권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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