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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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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쁨 작성일15-03-29 16:26 조회7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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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 2008·03·28 14:29 | HIT : 284 | VOTE : 7
 
 

== 김 앤윤 =


꽁트1 <신화적인 남편>

우술(又述) 씨, 아니 또술 씨는 말코다. 아내 산천댁은 남들이 하늘같은 내 지아비를 폄훼해서 부르는 듯한 호칭에 여간 심기가 불편치 않다.

‘우’를 ‘또’로 바꿔 부르는 거야 ‘또 우’ 자니까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이 ‘술’ 자다. 짓다․책 쓰다․펴다․말하다 - 이런 근사한 뜻을 혁명군처럼 죄다 몰아내고 알코올로 바꿔치기 했으니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 하던가. 남편 우술 씨가 술독에 한 열흘 빠졌다 나와도 낯빛 하나 안 변할 거란 속닥거림이 있을만치 주당(酒黨)이긴 해도, 그래도 예전에는 그렇게 술에 절어 살아오지는 않았는데, 우술 씨에서 또술 씨로 되면서부터 그만 술자리 상석(上席)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 어휴! 또 술, 또오 수울이야?

처음에는 평소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들 입에서나 튀어나오던 그 소리가, 한 동네 호열자 창궐하듯 마른 섶에 불길 번지듯 그렇게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으니.

그러나 산천댁이 진짜 열불 돋는 건 따로 있다. 그 또술이란 닉네임이 달고 온 주색(酒色), 아니 색은 아니고 그놈의 주, 그게 화근이다. 기실 우술 씨는 다른 여자라면 지레 송충이 보듯 하니 여자 관계 하나는 ‘딱’이고 그 점이 되레 남편을 향한 산천댁의 애정 보증 수표다.

팽이 돌 듯 바쁜 세상에 콩알새알 군말 더 늘어놓을 필요 없이 바로 ‘경제적 문제’가 그것이다. 모두들 돈에 눈이 허옇게 뒤집혀 사는 요즘 세상은 애정이고 낭만이고 중요하지 않다. 돈, 돈만 있다면야 대수랴. 그런데 돈과 술은 전생에 무슨 철천지원수지간인지 술꾼 재력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산천댁은 오래 전 화폐 교환 때 일만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에 불덩이가 인다.

“여보, 옆집 철이네, 뒷집 막순네, 모두 모두 화폐 교환 때문에 정신 없대요. 우리도 은행에 가서 돈을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반술은 되어 귀가한 또술 씨 왈,

“허어, 뭐 귀찮고 성가시게 은행까지 갈 필요 있나.”

그 말에 산천댁 귀가 토끼처럼 쫑긋. 우리 또술, 아니 우술 씨가 꼬불쳐 놓은 돈이 있구나.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한데 남편은 주머니 속을 한참 뒤적뒤적 하더니 지폐 한 장 달랑 꺼내 흔들어 보이면서,

“나 술집에 가서 바꿔 오리다.”

그땐 참말이지 남편이고 북편이고 그놈의 말코를 그냥 작살내고 싶었다. 뿐인가. 쌀 없다 하면 싸전 가면 천지다 하고, 땔나무 없다 하면 나무전 가면 천지다 하고, 돈 없다 하면 은행 가면 천지다 하고…. 여하튼 배울 만큼 배웠다는 인간이 그랬다.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 산천댁 귀에 딩동 딩동 하는 인터폰 소리가 들린다. 모니터를 보니 남편과 친구 하천한 씨다. ‘천하이’로 통하는 그 친구는 또술 씨 동갑내기로 단짝이다.

그런데 현관에서 그들을 맞이하던 산천댁은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천하이 씨 표정이 예사롭지 못하다. 둥글넓데데한 얼굴, 두툼한 입술에서 늘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그가 이날은 잔뜩 심술 난 시어미 상판때기다. 산천댁은 그러나 또술 씨 눈치보고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평소보다 더 무표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산천댁은 으레 그러하듯 거실에 술상부터 차렸다. 그렇지만 또 묘하다. 또술 씨는 손님 접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잔에만 술을 붓더니 혼자 쭉 들이켜는 것이다. 천하에 사람 좋기로 소문난 천하이 씨는 단풍 빛에 물든 돌부처같이 벌겋게 앉아만 있다. 산천댁이 하도 민망해서 천하이 씨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니 그제야 천하이 씨는 잔을 들어 술을 받는다.

집안은 온통 침묵의 늪이다. 간간이 안주 집어먹는 젓가락 소리, 소주 넘기는 소리, 자리 고쳐 앉는 소리, 그런 소리만이 한층 정적을 쌓아갈 뿐이다. 두 남자는 각기 자작하여 소주 두 병을 금방 바닥냈다.

산천댁은 냉장고에서 한 병 더 꺼내 와서 뚜껑을 따서 술상에 막 올려놓는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천하이 씨가 불쑥 손을 내밀어 소주병을 집어드는가 싶더니 나발을 불려는 게 아닌가. 비로소 또술 씨의 돌문 같은 입술이 열렸다.

“아, 이 친구. 단단히 골 먹었구먼. 참게, 참아.”

산천댁 가슴이 또 쿵 한다. 무슨 일이 있긴 있네. 또술 씨가 큰 실수를 한 모양이구나. 천하이 씨가 집어들었던 술병을 상 위에 내려놓고는 집안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산천댁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제수 씨, 내 말씀 좀 들어보세요, 글쎄.”

"마, 말씀 하, 하세요.”

그리하여 듣게 된 사연인즉 산천댁이 생각해도 귀 막히고 코 막힐 얘기다.

“내가 갑자기 돈이 좀 필요해서 말입니다. 이 친구한테, 내가 요즘 돈 구경을 좀 못해서, 하고 부탁했더니 자기를 따라 오래요. 그래 따라가니 은행으로 가요. 아, 은행에서 찾아 가지고 줄려나 생각했는데 웬걸, 은행 안을 가리키면서 한다는 소리가, 자, 이제 됐지? 실컷 구경했지? 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혼자 싹 돌아나가는 바람에 나도 얼른 뒤
 따라 나왔다고요.”

산천댁은 또술 씨에게 필요 이상으로 인상을 그려 보이며,

“당신, 정말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천하이 씨니까 이 정도지 만약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지요? 저 친구, 정말 신화적인 존재예요. 어찌 친구 사이라면서 그런 무안을 다 줄 수 있는지. 저런 사람도 남편이라고 같이 삽니까? 신화적인 남편이라니까!”

 “그럼 어떡해요? 어디 버려도 주워갈 사람도 없는데….”

둘이 무슨 대거리를 하든 말든 또술 씨는 새빨개진 말코 - 술 마시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는 -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대꾸가 없다. 그렇지만 그건 태풍을 불러오기 위한 전야의 고요함일 줄이야. 갑자기 그는 ‘우리 같이 건배하자고.’ 하면서 병을 들어 남이야 뭐라든 가장 자랑삼는 자기 코에 들이부으려는 게 아니냐.

산천댁보다 천하이 씨가 먼저 병을 빼앗으려 하고 또술 씨는 안 빼앗기려 하고. 하지만 결국 또술 씨가 힘에 부쳐 빼앗기고 만다. 그 경황 중에도 산천댁은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그녀 눈에 남편이 그렇게 나약하고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병-신 멍청이같이 친구한테 빼앗기다니. 우술 씨가 괜히 그랬을까. 친구가 모처럼 부탁하는데 꿔줄 돈은 없고 그래 그랬을 테지. 그렇게 한 자기 마음은 얼마나 쓰렸을까.

산천댁은 부리나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 마지막 하나 남은 소주병을 꺼냈다. 그런 후 얼른 돌아와 남편 앞에 내려놓으면서 속으로 소리쳤다.

‘여보! 이 술 먹고 기운 내요. 다신 빼앗기면 안 돼요, 당신. 그리고 천하이 씨 보내고 우리 두 사람 새로 술상 차려놓고 이 밤이 새도록 건배합시다. 당신의 신화가 깨트려지지 않게 되기를 빌면서…. 신화적인 내 남편 또술 씨를 위하여!’  (끝)                                                                        <2005년 4월호 국회보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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