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교회소식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구원의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기쁨 작성일15-03-29 22:59 조회806회 댓글0건

본문

< 전도는 어명이다 / 지은이 김두식 목사님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4-5, 9


구원의 이유
|예배자로 부르심|전도자로 부르심- 신분보다 더 중요한 사명|예배와 전도의 균형
|교회와 전도


베드로전서 2장은 조직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도대체 무엇일까여?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자와 전도자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이 두 가지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 예배자로 부르심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장18절, 7장 16절, 8장 20절, 27절, 12장 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바로에게 명령하십니다.
“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은 애굽에서 우상 숭배하고 있을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인 나에게 예배할 내 백성이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나에게 예배하도록 빨리 광야로 보내라 (Let my people go so that may worship me in the desert.)”
 이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이유는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를 왜 구원하셨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예배 드리도록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예배
 이같은 예배의 중요성을 망각한 잘못된 예배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김남준 목사님의 책에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예배에 임하는 다양한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 수면제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거나, 어떤 사람은 심지어 코를 골기도 하고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놀라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옆에 있는 사람이 깨우면, 정색을 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면 예배 시간에 단잠을 자게 하겠느냐, 성경도 모르느냐고 큰소리를 칩니다.

 둘째, 몸으로만 때우는 예배가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장로님의 기도가 좀 길어지면 이내 딴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정한 시간보다 좀 길어지면 설교는 듣지 않고 잡생각만 합니다. 집에 꿀단지라도 두고 온 듯, 마음이 딴 데 가 있습니다. 몸은 비록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 있는 것입니다. 허울만 있는 예배자입니다.

 셋째, 독서 예배도 있습니다. 수준 낮은 설교를 듣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말씀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설교시간 내내 성경책만 뒤적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넷째, 쪽지예배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은 듣지 않고 쓸데없이 쪽지를 돌리는 사람입니다. 예배당을 정리하다 보면 버려진 주보에는 이런 허탈한 낙서가 많습니다.
 귀중한 예배를 졸기나 하고, 몸만 와 있고, 독서나 하고, 쪽지를 돌리는 시간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하루속히 없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받으시려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4,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 신령한 제사를 받으시려고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희생이다.
 출애굽기는 예배를 “희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곧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 그 핵심 가치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죄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사를 드릴 때 형편이 낫고 부요한 사람은 송아지를 잡아 희생시켰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 그 형편도 안 되는 사람들은 비둘기를, 더 어려운 사람은 밀가루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형편과 처지에 따라 제물이 다르긴 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의 핵심 가치와 본질은 희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희생이 담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희생을 “신령과 진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령과 진정이 바로 예배의 핵심 가치 본질입니다. 이것이 곧 예배이고 희생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많은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희생이 담긴 예배를 몇 번이나 드렸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희생이다”라는 말은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배 드리러 주일 아침에 나가려는데 보고 싶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발목을 잡습니다. 혹은 좀 쉬고 싶습니다. 소파에 눕거나 방에 누워서, 아니면 욕조에 들어가서 푹 쉬고 싶습니다. 또 만나고 싶은 사람도, 오라는 곳도,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희생해야 될 것들은 희생하지 않고 예배를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받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희생해야 될 것은 희생하지 않고 예배를 희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불러주셨는지, 왜 구원하셨는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면서, 희생해야 할 것을 희생하는 대신에 예배를 희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번의 예배를 드리더라도, 희생을 담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 전도자로 부르심- 신분보다 더 중요한 사명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아주 특별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두 번째 이유요, 목적입니다. 곧, 자신의 구원의 덕을 선전하도록 우리를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 있던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구원의 덕을 선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전요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상반절과 하반절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먼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까지의 상반절은 우리의 구원받은 신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반절 말씀은, 신분에 따르는 의무, 사명,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헬라어 문법 구조는, 하반절을 말하기 위한 구조입니다. 헬라 문법상 하반절을 더 강조하고, 하반절을 말하고 싶어서 상반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면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롬 5:6), 죄인이라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롬5:8), 하나님의 원수였는데(롬 5:10), 그런 너희를 불러내어 기가 막힌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덕을 선전하고 전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신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신분에 따르는 의무와 사명과 책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두 번째 이유는 예배 드리고 돌아서서 전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예배와 전도의 균형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와 전도자로 부르셨는데, 문제는 균형입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만큼 성수 주일을 강조하는 교회는 없기에 예배는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신 또 다른 목적, 전도의 삶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아 무력했던 삶을 일으키고 능력과 채움을 받아 전도하도록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이었습니다. 전도하다가 힘들고 좌절하고 거절당하면 예배를 통해 다시 회복하고 새 힘을 얻어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배와 전도의 균형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배자와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즉, 예배와 전도가 일대일로 균형잡힌 삶을 살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5000 : 0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배는 수천 번을 드렸건만, 전도는 전혀 하지 않는 심각한 영적 불균형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 믿는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예배 한 번 드리고 돌아서서 전도 한 번 하도록, 즉 예배와 전도의 일대일 균형잡힌 삶을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5000 : 0의 삶은 이제 종말을 고하십시오 예배만 드리고 곧장 집으로 가면 안 됩니다. 가다 누구를 만나든 전도하고, 집에 가서 가족에게 또 전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길입니다.
 


* 교회와 전도

 
 살아있는 조직신학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웨인 그루덤입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석학입니다. 세계 최고의 명문 신학교들은 현재 웨인 그루덤의 조직신학책을 가지고 공부를 합니다. 불세출의 명저인 『조직신학』에서 웨인 그루덤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3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교회는 예배(Worship)드리는 곳으로,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 드릴 사람을 모으려면 전도(Evangelism)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된 새 가족이 다시 전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양육, 훈련(Nurture)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는 전도의 중추 신경의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교회 없이는 구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가 전도를 잘 못하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싸웁니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전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예배자로서, 전도자로서 충실하게 살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다툼을 일삼고 있다면, 전도란 너무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둘째, 관심의 우선순위가 다른 데 있습니다.
구제, 봉사, 건축에는 관심이 많은데, 복음 전도에는 관심 갖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전도회, 남전도회가 어떤 조직입니까? 여전도회는 여자들을 전도하는 모임, 전도하는 여성들의 모임입니다. 남전도회는 남자들을 전도하는 모임, 전도하는 남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남녀전도회는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움직여야 합니다. 진정 전도하는 전도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행함의 부족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행함이 없습니다. 전도 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배에서 돌아서면 예배 그 이후가 실종되고 없는 것입니다. 왜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 형식적으로 와서,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축도받고 돌아가는 성도가 너무 많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삶의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머리가 너무 큽니다. 듣고 배운 것이 많아 모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머리도 크고 눈과 귀 다 있는데, 한 가지 손발이 미숙합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삶으로 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불균형과 장애를 속히 극복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두 가지는 이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와 능력을 받아, 그 힘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배와 전도의 균형 잡힌 삶이 목숨 걸어야 할 두 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살고, 전도를 통해 남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리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경남 진주시 대신로 243번길 16 TEL / 교회 : 055)761-6866, FAX : 055)753-8379
본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자동 수집되는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Copyright 2006 - 2024 daekwang.info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