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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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성 작성일19-04-21 11:58 조회2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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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으로<요20:19-23>(주낮)
부활이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부활신앙”은 경험되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의 문
19절에서 “문”을 닫았다. 라는 것은 “집의 문”을 닫았다는 것도 되지만, 실은 “믿음의 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을 다 흩어지고 도망갔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해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성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모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을 닫으려다 “믿음의 문”까지 닫아 버리는 오류를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런 닫힌 문이 그대로 인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즉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손과 발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 그대로 그 “몸”으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혼란을 기쁨으로 돌려주십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19,21절에서 두 번에 걸쳐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말씀은 그들의 혼란속에서 주신 말씀으로 제자들이 아멘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혼란이 기쁨으로 변화된 뒤에서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단어는 “에이레네”라는 단어로 “다시 하나가 되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가 된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이레네”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할
우리가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령의 능력”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사제 면제권”같은 것은 말도 안된다 하겠습니다. 보통 원어로 “퓨뉴마”를 “성령”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뜻에는 “인간의 이성적인 영, 정신적 기질 또는 천사, 마귀”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에 해당하는 “하기온”이란 단어와함께 “하기온 퓨뉴마”가 되어야 합니다. “하기온”은 “거룩한, 순결한, 결백한”이라는 뜻으로 “거룩한 영, 성령, 삼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기온”의 속성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으로 부활신앙으로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근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근원, 근본”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줄기와 잎사귀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증인”의 자리가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그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부활승천 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듣고, 보고, 확인했다.”라고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우리도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부활신앙”의 뿌리를 내린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나눔) 십자가를 넘어서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증인”된 자로서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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