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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왜 어려운 이야기만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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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oshua 작성일18-01-21 20:29 조회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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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서로 나누고 같이 생각해보기 위해서 써봅니다.

얼마 전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고, 아주 열심히 활동한 건 아니지만 교회에 특별히 빠진 적 없이 다닌 보통 사람입니다.
이야기 중에 구원을 받았는지 물어보니 잘 모르겠답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구원이 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철이 든 후 십 년 가까이 무엇을 했을까요... 그 교회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교회에서 설교 안 들었느냐, 설교 때 배운 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듣고 까먹는 것도 있긴 하겠지만 정확히 설명을 들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아주 안 들었을 수는 없는데, 아무튼 목사님 이야기는 늘 뻔한데도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내용이나 문장이나 단어가 어려운 게 아니라 막연하기 때문이라고요.

한마디로 '추상적'이라고 합니다.

추상적이라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요. 그림에서도 뭔가 구체적 사물을 그리면 추상화가 아닙니다. 자기네 목사님의 설교는 딱히 그려지는 게 없고 그냥 잘하라는 것, 잘하면 좋다는 것, 구원받으면 '고민 끝, 행복 시작'이고, 천국을 소유하며 땅의 복도 받는다는 것 등등인데, 들어보면 다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주제와 다른 예화로 참 신기하게 매주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 상태가 되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그렇게만 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만 한다는 것인데, 가만히 보니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도 그 방법은 모르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긴 읽는데 해당 구절의 설명은 5분도 안 되고, 나머지는 다 추상적인 내용으로 채우고요. 강해도 강론도 아닌 스피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청소년 도서를 보니 이런 대목이 있더군요.

"아빠는 왜 어려운 이야기만 하실까?"

아빠들이 어려운 단어를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용은 쉬운데, 그 말을 따르려 해도 너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거기 예로 나온 아빠들의 어려운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살 때는 항상 눈치와 요령이 있어야 해."
"인생에는 꿈과 야망이 있어야 한다."
"경쟁 사회에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거야."

지금 아빠들은 생각할 겁니다.
맞는 말인데? 뭐가 어렵다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 아빠들이 자주 하는 방식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빠들은 대화를 자주 못하기 때문에 모처럼 기회가 오면 평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을 들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런 이야기는 어디서나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 현실은 모의고사 점수 몇 점 올리는 것이나 갖가지 자잘한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인생과 야망과 세상과 사회의 막연한 것들을 말하니 아이들은 묻고 싶은 겁니다.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요?"

목사님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성공한 인물들의 굉장한 예화가 등장하고, 구원받아서 가는 영원히 행복한 천국이 나오고, 하나님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거룩한 인생이 나오는데....

대체 어떻게요?

도무지 두루뭉술하고, 그렇게 되는 방법은 몇 년, 아니 평생을 기다려도 안 알려준다는 겁니다. 답답한 나머지 교회 밖으로 나가 알아볼 때까지도 안 알려줍니다.
물론 저런 이야기도 필요하지요. 다만 구체적인 이야기가 너무 없이 늘 그런 이야기로만 이어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늘 구체적인 구원 설교와 성경공부 식 강해만 이어져도 안 되겠지요.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나오되 강해가 기본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구원과 복음과 성화와 천국과 성공과 축복과 평안... 이렇게 좋은 이야기들이 피부에 와 닿으려면 구체적 매뉴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칼처럼 자른 행동 매뉴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원리와 상태를 우선적으로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해함은 모호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성화의 전쟁을 치르며 천국을 향해 나아갑니다. 제대로 알든 잘 모르든 인생은 전쟁터이고, 종착역에서는 공포의 죽음이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해결 받으려는 것인데... 이 과정이 모호해서 어려워지면 청년들은 미로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확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기인한 성경의 추상적 해석과 교리의 모호함 때문이라고 봅니다. 말이 좀 추상적이고 어렵나요?

다시 말해서, 성경의 불변성과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믿지 않고 알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구절들을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처럼 추상적 교훈으로 이해해 전달하고, 실재적 교리는 신학의 영역에서 고시공부처럼 하는 것으로 제쳐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아니라 그 청년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추측입니다.

구원은 영속성이 없으면 인생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만 조장합니다. 그러니 죽기 직전 임종 때 영접하는 게 최고라는 농담이 나오는 것이죠. 이것에서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의 휴거가 언제이고, 천년왕국이 어떤 세상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 불신자들은 언제 어떤 심판을 받아 어디로 가는지 등등이 명확히 그려져 있고, 그것을 확고히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면 어떤 추상적 이야기도 소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필수 과정을 추상적으로 만들어버리면 풀 수 없는 실타래가 되고 맙니다. 설교는 매번 거기서 눈에 띄는 색깔의 실을 잡아당겨 보여 주기만 하니 끝내 풀지 못한 덩어리는 늘 마음에 남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 항상 어려운 이야기만 하실까요?

나무는 보여 주는데 숲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끼리의 한 부분은 만지게 하는데 코끼리 전체를 보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어느 부분인지, 무엇 때문에 그 나무는 거기 있어야 하는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청년은 오늘도 교회에 갑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올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이야기의 토막들이 가득한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면서 어떤 것을 붙잡아야 살아나올 수 있는지 몰라 그대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나마의 교훈도 교회 문을 나서면 사탄이 와서 즉시 채어갑니다.

설교자가 사람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는 어렵습니다. 설교만으로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죠. 제 말씀은, 그런 형편인데 설교마저 모호하면 어떻게 길을 찾겠느냐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듣는 교훈이란 것이 승려들의 책자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 것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길을 묻다>(?) 수준의 선문답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요.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그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 (암 8:13)

이 말씀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추상적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에서, 젊은이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그 ‘길’을 찾아 오늘도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김재욱 작가의 교회의 문제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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