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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아내들 삼인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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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혜성전도사 작성일22-05-11 11:02 조회2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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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감옥으로 돌아가시오!” - 오정모 사모(주기철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수감당하시던 중

늙으신 어머니가 병약하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안타까운 날을 보내시는데

하루는 일본 고등계 형사가 와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아프신 어머니를 뵈러 가라. 지금 감옥을 나가라.

당신이 나가서 신사참배를 하든 / 안 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단, 신사참배를 죄로 정죄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는 주기철 목사님을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주 목사님은 그런 요구에 “그렇게 하겠다/안 하겠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거저 어머니를 뵙겠다는 일념으로 그 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사모님(아내)은

“여보,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시오!”

그래서 주 목사님은 발걸음을 돌려서 감옥으로 자기발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후에 거기서 순교하셨다.

인간인지라, 여생이 얼마 안 남은 노모를 곁에서 지키려는 애틋한 정이 끓어올랐지만

아내의 단호한 충고를,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했다.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 “목사님이 아직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네 차례나 검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주 목사가 1차 검거에서 석방되어 나왔을 때 그는 산정현교회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2천여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다.

주 목사는 1940년 6월 네 번째 투옥되어서 1944년 4월21일에 순교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유서를 써서 집에 보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 어머님을 잘 봉양하십시오.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이 유서를 받아든 오정모 사모는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

고 반문했다.

이런 믿음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주 목사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의 순교를 각오한 훌륭한 사모가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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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상에게 절하면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 정양순 사모(손양원 목사님)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순천 형무소에서 1년 7개월 형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사모님 정양순은 애양원을 지키면서,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를 늘

드리셨는데, 그 기도내용이 정말 인상적이다.

보통 아내들은 “우리 남편 건강하게 해 주세요, 빨리 출옥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 목사님의 사모님은 “우리 손 목사님,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도한지 1년 7개월이 지났다.

만기 출옥을 해야 되는데, 개정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다시 종신형을 받았다.

그래서 순천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던 도중, 잠시 길에서 사모님을 만났다.

보통 부인 같으면, 정말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은 성경책을 펴고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목사님께 보여주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만약 우상에게 절하면,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

매정한 사모님인가? 아니면 대단한 사모님인가?

훌륭한 순교자 목사님 뒤에는, 이런 훌륭한 사모님이 건재해 있었다.

여수 -애양원 홈페이지- 에 가시면

손양원 목사님의 설교 등 여러 자료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손양원목사 장례식후 가족 사진

1950년 9월28일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심으로 장례를 했다. 장례식후 찍은 가족사진.

맨 뒤의 학생은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죽였던 안재선 씨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은 손양원 목사 사모님 정양순 씨이며

안고 있는 아들은 손양원 목사님이 돌아가신 날 새벽에 태어난 손동장 목사님이다.

현재 분당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 옆에 있는 아이들은 둘째딸 동임 씨와 셋째 동연 씨이다

 

첫째 아들 손동인 씨의 모습

1925년11월6일 출생했다.1948년10월21일 여순사건 때 순교하셨다.

순천사범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순교하셨다.

당시 동인씨는 기독학생 회장이었을 뿐 아니라

좌익 계열 학생들의 활동에 반대를 했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미국(하와이 고모네) 유학을 가도록 되어 있어서

좌익들이 미제의 앞잡이라고 온갖 박해를 가했다.

그러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맨 먼저 좌익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좌익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도를 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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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 여사

 

“하나님, 한국에서 남은 아들과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순교자의 아내.

한국에서 낳은 아들까지 의사로 키워서, 한국의 결핵퇴치 사업에 대대로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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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홀 여사 가족 사진, 윗쪽은 남편 윌리엄 홀 >

 

그녀는 한국에 남편 보다 1년 먼저 와(1890), 43년간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여러 '최초'를 기록해 놓은 인물이다.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현재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하였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김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선교사는 로제타의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윌리암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도 윌리암 홀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1890년,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온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된다.

그들은 1892년 6월 21일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로제타는 홀과 결혼함으로 그때로부터 홀 부인으로 칭함 받게 된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1894~1895)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월리엄 홀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1894년,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 평양에서 서울에 도착한 윌리엄 홀 선교사는,

부인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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